남명 조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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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창현(33회) 작성일25-04-24 10:24 조회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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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암부(民巖賦)
물이 배를 띄울 수도 뒤엎을 수도 있듯이, 백성도 임금을 추대할 수도 쫓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물을 떠나서는 배가 움직일 수 없듯이, 백성과의 관계를 떠난 임금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같은 물이라도 고요할 때가 있고 성낼 때가 있듯이, 백성들도 온순할 때가 있고 무서울 때가 있다. 그러므로 한 나라도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멸망되기도 한다. 국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백성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쪽으로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 지배계급이 지켜야 할 대원칙이다. 배를 저어가는 사람은 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조심하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백성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소홀히 하여 업신여기게 된다. 임금이 이런 지경에 이러르면, 백성들은 그들의 손에 있는 대권(大權)을 발동하게 된다. 하(夏) 나라의 걸(桀), 은(殷) 나라의 주(紂), 진(秦)나라의 호해(胡亥) 등이 백성들을 업신여기다가 백성들의 대권에 의하여 밀려난 예이다.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임금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잘 협조한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면, 백성들도 그 임금을 떠받들어 그 임금은 성군이 되고 그 나라는 융성한다.
3년 뒤, 1558년 4월 삼가를 출발, 화개동천 유람길에 나섰다. 불일폭포(不一瀑布)를 전설의 청학동(靑鶴洞)으로 생각하며 다음 시를 지었다.
獨鶴芽雲歸上界 외로운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從知無累繁爲累 성가신 일 없는 게 오히려 괴로운 걸 알았으나 心地山河語不看 심지는 산하의 말을 볼 수가 없구나.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의 사윤동(絲綸洞)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후세에게 가르쳤다. 덕산에 터를 잡고서(德山卜居) 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白手歸來向物食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건가 銀河十里喫有餘 10리에 걸친 은하수처럼 맑은 물 마시고도 남겠네. 덕산 냇가 정자 기둥에 쓴 시(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鍾 청컨대, 천석의 거대한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爭似頭流山 어떻게 해야만 마치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욕천(浴川) 세심정에서 목욕하고 나서 쓴 시
全身四十年 前累 온몸 40년 동안 쌓인 티끌 千斛淸淵 洗盡休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 버렸다,
塵土倘能 生五內 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속에 생긴다면, 直金刳腹 付歸流 지금 당장 배를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보내리라.
설매(雪梅)
한 해 저물어 홀로 서있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밤새 눈이 내렸구나 선비의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산천재 앞에 남명선생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樹齡) 450여년을 자랑하는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 지리산 기상처럼 대쪽 같은 시를 지었고, 다음 시조도 남겼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 山影)조차 담겨세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66세에 (명종 21년) 왕과 독대(獨對)하여 치국지방(治國之方)과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하고 귀향하였다. 71세 때 선조(宣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가지 않고, 헌책(獻策)을 진언했으나, 조정에 반영되지 않아 속히 실행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국정에 대한 마지막 발언이다. 72세(1572) 되던 해 2월, 천수를 다하고 산청군 시천면 사윤동(絲綸洞)에서 운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제물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士林)은 모두 곡(哭)하여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가장 많았다. 곽재우는 조식에 손녀사위이며, 정인홍. 김천일 등이 모두 제자이다. 1615년, 선생 사후(死後) 광해군(光海君) 7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후세 문인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선생의 처세는 불구종(不苟從) 불구묵(不苟默)이니, 불의를 보고 구차하게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지도 않았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선생의 공덕은 입유렴완(立濡廉頑)으로,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만들었고, 탐악한 관료들을 청렴하게 만들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이는 이 세상 오직 남명 뿐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남명은 차고 다니던 패도(佩刀)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썼다. '안에서 밝히는 것은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이 패도의 이름을 '경의검(敬義劍)'이라고 불렀다. 또 선생은 '성성자(猩猩子)'라 이름한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움직일 때 마다 들리는 그 소리로 자신의 의식을 깨우는 수행을 하였다.
선생인 남긴 저술은, 시문집(詩文集)인 <남명집(南冥集)>과 <학기류편(學記類編)>이 있는데, 시문집은 직접 지은 시(詩)와 문(文)을 모아 편찬한 것이고, 학기류편은 선생이 독서하는 과정에서 학문하는데 절실한 문구를 뽑아 기록해 둔 것으로, 문인(門人) 정인홍(鄭仁弘)이 유별로 모아 편찬한 일종의 독서기(讀書記)다.
남명의 유적은, 합천(陜川)에 생가, 용암서원, 뇌룡정이 있고, 김해 대동면에 산해정(山海亭) 숭도사(崇道祠), 유위재, 환성재, 남명선생의 본처 정경부인 묘소가 있고, 산청에 덕천서원, 세심정, 숭덕사, 산천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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